궁상인지 습관인지는 내가 정할게
젖은 머리를 말리려고 선풍기를 켰습니다. 1단, 너무 약해서 여름내 한 번도 눌러보지 못한 수준인데도 팔에 닿는 바람이 살짝 으슬합니다. 때가 되었군요. 이제 선풍기를 넣을 때입니다.
말려놓은 걸레에 물을 적셔 꼭 짭니다. 마른 행주 하나도 새로 꺼냅니다.
선풍기를 분해해서 꼼꼼히 닦습니다. 사용하는 동안 선풍기 날개는 몇 번 닦은 적이 있어서 물로 씻지 않아도 될 정도입니다. 마른 행주로 남아 있는 물기도 마저 닦아줍니다.
구석에 세워둔 선풍기 상자의 먼지도 꼼꼼하게 닦습니다. 분해한 선풍기를 상자 안에 차곡차곡 넣습니다. 복잡한 모양의 선풍기가 흔들림 없이 단정하게 들어갑니다. 조립부품과 리모컨도 봉지에 넣어 잘 찔러 넣습니다.
물론 선풍기 분해 전에도 사진 한 장 찰칵, 상자에 넣은 후에도 사진 한 장 찰칵. 이렇게 찍어두면 내년 5월 다시 선풍기를 조립할 때 날개 방향이 어디더라? 어느 부품이 먼저더라? 더듬더듬하지 않아도 됩니다. 올해의 나는 내년의 나를 믿지 않습니다. 어설픈 믿음보다는 확실한 증거를 남기는 것이 과거와 미래의 내가 불화하지 않는 비결입니다. (작년의 내가 배려해준 덕에 올해 나도 편했습니다)
선풍기는 어느새 딱 떨어지는 상자가 되었습니다. 먼지가 들어가지 않도록 테이프로 한 번 더 마감하고 상자가 있던 자리(구석)에 잘 끼워둡니다. 이것만으로도 베란다도 없고 수납공간도 부족한 내 공간 흉을 보지 않고 긴 겨울을 날 수 있습니다. 정신건강에 매우 좋습니다.
5월 선풍기를 꺼내 닦아 조립하고, 10월 선풍기를 해체해 닦고 넣을 때마다 집안 곳곳 콘센트 구멍의 먼지도 꼼꼼하게 닦아줍니다. 마른걸레질을 한 참이니까요. 이렇게 일년에 두 번, 콘센트 구멍 묵은 먼지를 닦아주는 것만으로 새 것 비슷하게 청결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 콘센트는 5년도 전에 이 집으로 이사올 때 직접 교체했습니다.(그 전의 콘센트와 스위치의 누런 색은 차마 못 볼 수준이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집이 덜 낡아보이고 더 깨끗해보입니다. 역시 정신건강에 매우 좋습니다.
올해는 과정 하나가 더 추가되었습니다. 그야말로 길고 긴 장마 기간 내내 신세지던 비옷 2벌(내 비옷 개 비옷)을 씻어 밀린 후 잘 접어 계절용품 서랍에 넣었습니다. 당분간은 비옷 입고 산책하는 거, 나와 함께 사는 개가 거절할 거니까요.
집이 넓다면, 수납공간이 충분하다면, 베란다가 있다면 하지 않아도 될 일입니다. 선풍기는 커버를 씌워 그대로 넣어두면 될 테고, 비옷은 옷장에 걸면 더 편리하지요.
내가 못 가진 것들에 대해서 짜증내는 것보다는 가지지 않고도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습니다. 내돈내산(내 돈으로 내가 산다)처럼 내손내한(내 손으로 내가 한다)이라고 할까요.
누군가에게는 궁상으로도 보일 수 있겠지만 나는 이것을 습관 혹은 루틴이라고 정하기로 합니다. (혹은 정신승리일 수도 있습니다)
돈이면 다 되는 일이지만, 꼭 돈일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돈으로 할 수 있는 형편이면 그렇게 할 겁니다)
나는 나를 잘 압니다. 생활의 궁상을 털어내는 건 내 수고뿐이라는 것을.
한 철 잘 보냈던 대자리를 꼼꼼하게 닦아 말린 후 접어두고 폭신한 러그를 까는 것, 얇은 커튼을 떼어 씻고 두꺼운 커튼을 새로 다는 것, 뽁뽁이 단열재를 사서 창문에 붙여두는 것, 화분에 영양제 하나씩 꽂아두고 볕 좋을 때만이라도 바람 쐬게 해주는 것 등 가는 계절 잘 보내고 오늘 계절 잘 맞이하는 건 주머니 형편에 상관없이 우아한 일이라는 것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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