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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길도 든든하게

비지는 거들 뿐인 외할머니 비지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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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비지찌개 다른 데선 못 봤는데

 

어린 시절, 아주 잠깐 외갓집에서 산 적이 있어요. 엄마 아빠 동생까지 다른 곳으로 이사가면서 나만 잠깐 외갓집에 두고 간 거였어요. 엄마가 그랬어요. 지금 전학하면 적응하기 힘드니까 새 학기 시작하면 와. 이제 씩씩한 1학년 언니니까 그럴 수 있지? 엄마가 집 깨끗하게 치워놓고 있을게.

나는 1학년 언니이고, 이제 더 이상 아기가 아니니까 씩씩하게 그러겠다고 했습니다. 동생은 아직 아기라서 엄마와 함께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도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슬프진 않았어요. 그곳은 외갓집이고, 늘 가고 싶던, 이모들과 삼촌이 있던 곳이니까요.

 

외갓집에 있는 동안, 엄청 사랑받은 것 같아요. 단 한 번도 야단맞지 않았어요. 외할아버지는 발 위에 저를 올려 둥가둥가를 매일 밤 해주었고, 외할머니는 이런 저런 간식도 자주 해주셨죠. 빌로드 치마를 입은 외할머니 손을 잡고 시장에 간 건 지금도 따뜻한 기억이에요. 엄마와 달리 천천히 걷고, 이것저것 구경해도 뭐라고 하지 않으셨거든요.

엄마가 가장 보고 싶을 땐 자기 전이라거나 이런 때가 아니라 꽃게찌개를 먹을 때였어요.

엄마의 꽃게찌개는 고춧가루를 넉넉하게 넣고 국간장으로 간하는, 양파도 듬뿍 넣어 달큰한 국물이었는데 외할머니의 꽃게찌개는 지금으로 치면 꽃게된장찌개나 꽃게된장국에 가까웠어요. 엄마의 꽃게찌개가 그리웠어요.

 

외할머니 댁에서 처음 먹어 본 음식도 있는데, 비지찌개입니다.

외할머니는 김치와 콩나물, 호박과 파 등 각종 채소를 넣은 비지찌개를 해서 제 앞에 한 그릇 놓아주셨죠. 너는 고기를 안 먹으니 이런 거라도 먹어야 키가 큰다면서. 엄청 꼬꼬마였던 시기라 먹었는데 의외로 제 입에 맞아서 호호 불어서 오물오물 먹곤 했어요.

외할머니는 신통하다, 신통해 하면서 더 먹어라 더 먹어라 하셨죠.

 

학기가 되고 드디어 아빠와 엄마, 동생이 있는 집으로 가게 됐습니다. 가족과 함께 살아서 물론 좋았지만 잔소리 없이 뭐든 호호호호 웃으면서 맞다, 맞다, 네가 옳다 하던 외할머니와 함께 있던 시절도 좋았는데 했지요. 외할머니가 해주시던 비지찌개가 생각나서 엄마에게 비지 먹고 싶다고 하얗기만 한 비지가 가득 있었던 게 기억납니다.

 

온라인 장보기를 하다가 국산콩 콩비지를 발견했습니다. 어쩐지 그 때 생각이 나더라고요.  

처음 외할머니의 비지찌개를 먹은 그 날도 깜깜한 겨울 저녁이었습니다.  비지 하나 사서 기억을 더듬이 해보았습니다.

 

 

 

1. 멸치다시마육수 300cc쯤 붓고 신김치를 잘게 잘라 팔팔 끓입니다.

 

 

 

2. 육수가 끓으면 애호박과 종종 썬 대파를 넣고, 비지도 한 봉지 털어 넣은 후 채소가 익어갈 때까지 끓입니다. 이 때 국간장 살짝 넣어 간을 약간 하세요.

 

 

 

3. 애호박이 다 익어간다 싶으면 숙주를 넣으세요. 숙주를 넣어 뒤적여주면 됩니다. 숙주는 금방 익고 숨도 빨리 죽습니다. 숙주가 익으면 간을 보고 간이 부족하면 국간장을 조금 더 칩니다. 

 

 

그릇에 담아 퍽퍽 퍼먹으면 됩니다. 밥과 함께 먹어도 좋고, 비지찌개만 듬뿍 떠서 한 그릇 먹어도 좋습니다.

먹기 직전 참기름 쪼르륵 더해도 물론 좋습니다. (전 안 넣어요)

 

 

당연히 그 맛은 안나지만, 맛은 괜찮습니다.

숙주나물에 듬뿍 묻은 비지를 함께 먹는 맛이 좋습니다. 한 번 해드셔도 좋겠습니다.

 

 

일 년에 두 번(추석과 설), 외할머니께 용돈을 부치고, 전화를 드립니다. 외할머니는 “고맙다, 고맙다, 우리 아기가 벌써 언제 이렇게 커서 할미한테 돈을 주네.” 이 소리를 지금까지도 하시죠. 앞으로도 오래 오래 그 소리를 듣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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