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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좋자고 하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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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을 잘 보내고 맞이하는 법 궁상인지 습관인지는 내가 정할게젖은 머리를 말리려고 선풍기를 켰습니다. 1단, 너무 약해서 여름내 한 번도 눌러보지 못한 수준인데도 팔에 닿는 바람이 살짝 으슬합니다. 때가 되었군요. 이제 선풍기를 넣을 때입니다.말려놓은 걸레에 물을 적셔 꼭 짭니다. 마른 행주 하나도 새로 꺼냅니다. 선풍기를 분해해서 꼼꼼히 닦습니다. 사용하는 동안 선풍기 날개는 몇 번 닦은 적이 있어서 물로 씻지 않아도 될 정도입니다. 마른 행주로 남아 있는 물기도 마저 닦아줍니다. 구석에 세워둔 선풍기 상자의 먼지도 꼼꼼하게 닦습니다. 분해한 선풍기를 상자 안에 차곡차곡 넣습니다. 복잡한 모양의 선풍기가 흔들림 없이 단정하게 들어갑니다. 조립부품과 리모컨도 봉지에 넣어 잘 찔러 넣습니다.물론 선풍기 분해 전에도 사진 한 장 찰칵, ..
한 시절이 가도 잊지 말아야 할 것 "꼬옥 안아 줘, 꼬옥" 오자와 마리라는 만화가의 작품을 참 좋아합니다. 읽고 나면 삐죽삐죽 거칠게 일어난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고 싸늘한 손이 따뜻해져 옵니다. 세상의 온도가 2도쯤 올라간 것처럼 느껴져서 추울 때 읽으면 뜻밖의 난로 효과도 있습니다. 오자와 마리의 작품에는 악인이 없어요. 그 때 나쁜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때로 주인공을 음해하고 괴롭히기도 하고, 얄미운 말과 행동으로 속상하게도 하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그의 미움, 그의 행동, 그의 말이 이해되기도 합니다. 그거 언젠가의 내 모습이기도 하니까요. 오자와 마리의 세상이 동화 속처럼 아름다운 건 아닙니다. 누구나 저마다의 짐을 지고 가듯 이곳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힘들 땐 힘들어도 웃을 수 있는 아주 작은 순간을 놓치지 않고 웃는 사람들이..
일해라 절해라 말 대신 만두 속 아빠 마음어릴 땐 편식이 심했습니다. 그 때문에 나름 마음고생이 많았습니다. 먹기 싫어서 먹지 않는 것이 아니라 먹지 못해서 먹지 않는 것이었는데도 주변 어른들로부터 이런 저런 걱정을 들었죠. 그나마 집에선 저의 편식이 익숙해서 핍박이 좀 덜했지만 고모나 이모댁에 가면 꾸중 섞인 음식강요가 있어서 좋은만큼 싫었습니다.제가 먹지 않는 건 고기류와 생선류였어요. 물론 고기와 생선이 들어간 국물도 못 먹었어요. 특히 냄새도 맡기 싫었던 건 곰국류였습니다. 실제로 곰국 끓이는 냄새에 구역질이 나와 엄마한테 호통을 들은 적도 있어요. 음식 앞에서 별스럽게 군다고.식탁에 놓인 반찬 중에 내가 먹을 수 있는 건 몇 개 안 되어서 젓가락질이 집중되곤 했는데 엄마 기분이 좋지 않을 땐 눈치가 보이곤 했거든요. ..
다정할 수 있을 때 한껏 다정해야지 보고 싶었어, 정말 보고 싶었어 자주는 아니어도, 뜸하다 싶으면 누군가가 볼까 해서 만나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이런 저런 인연으로 서로 안 지도 10년쯤 되었네요. 생각해보면 소중한 인연입니다.2019년 연말, 마스크를 쓰지 않고 얼굴을 가까이 두고 당연한 듯 음식을 나눠먹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던 송년회 이후, 우리는 꽤 오래 만나지 못했습니다. 네 어쩌다보니 2020년이 되었고, 코로나19가 일상 깊숙한 곳에 와 있었으니까요. 친구들은 모두 조심성도 많고 배려심도 많은 터라 그야말로 집과 회사만을 오가며 각자 지냈습니다.그렇게 오래 오래 참다가 코로나가 좀 진정되고, 거리두기가 완화되고 사람들 마음도 좀 푸근해졌을, 아주 짧은 그 시기에, 우리는 만나기로 했습니다.그들을 만난다는 게 너무 좋아서 ..
네가 가르쳐 준 무심한 예의 적당한 거리에서, 안녕하는 기쁨 새벽 산책을 할 때 주의하는 게 있습니다. 거리나 공원에서 생활하는 길고양이들에게 위협적인 존재로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무관심입니다. 한껏 다정한 목소리로 괜찮아 어쩌고 해봐야 어차피 침입자 혹은 낯선 이의 낯선 목소리일 테니까요. 설사 아주 귀여운 녀석이 있더라도, 아기 고양이 꼬물이를 보더라도 꾹 참고 절대 모른 척, 걸음걸이의 변화 없이 나는 관심이 없어,의 자세로 지나갑니다. 혹시 멈춰야 하는 상황이라면 최대한 그쪽을 보지 않습니다. 이런 태도를 가르쳐준 건 같이 사는 친구 입니다. 친구는 길에서 만나는 개나 고양이, 비둘기나 참새에게 항상 적당한 거리를 유지합니다. 나는 너를 불편하게 할 생각이 전혀 없어, 라는 분위기를 온몸으로 풍긴달까요. ..
누구에게든 한 뼘의 햇빛 새로 온 식물을 환영하는 방법 어젯밤까지만 해도 비가 오고 바람이 세게 불어 온 집의 창을 꼭 닫아두었는데, 오늘은 날이 갰습니다. 햇빛이 나고 하늘이 맑고 바람이 기분 좋게 붑니다. 잽싸게 창을 열고 우리 집 식물님의 자리를 옮겨줍니다. 지금 이 순간, 가장 좋은 자리를 내드립니다. 우리 집에서 몇 년을 같이 산 어르신들은 좀 뒤에서 느긋하게, 키 작고 어린 식물들은 창가에 올려 햇빛 샤워 바람 샤워를 즐기게 합니다. 이파리들이 살랑이는 것이 어쩐지 기분 좋아 보입니다. 창가에 있는 작은 식물 중 맨 왼쪽에 있는 게 스투키입니다, 친구의 소개로 만나게 됐습니다. 우리 집에 온지 두 달이 안 됐어요. 스투기 입장에서는 온도와 습도, 햇빛과 바람이 적당하고, 섬세하게 돌봐주는 사람이 있던 화원에서 이곳으로..
적당한 시간이 필요해 _ 커피의 말 무엇이든 방공호 하나는 갖고 있기를 별 이유 없이 나를 볶을 때가 있습니다. 내가 가진 것들이 비루하고 초라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일단 그쪽으로 스위치가 켜지면 마음은 아래로 아래로 굴러가고, 발은 자꾸만 빨려 들어갑니다. 이대로 조금만 더 가면 나의 불안이, 나의 불만이 나의 초라함이 나를 잡아먹고야 말 겁니다. 그럴 때 나의 방공호는 커피입니다. 얼른 안전문을 열고 피신합니다.원두를 갑니다. 내 손을 써서 돌려야 합니다. 급하게 돌리면 원두가 밖으로 튀니까 조심조심 갈아야 합니다. 물을 끓입니다. 서버 위에 드리퍼를 얹고 뜨거운 물을 부어 서버와 드리퍼를 잠깐 데웁니다. 드리퍼에 여과지를 깔고 갈아놓은 원두를 조심스레 붓고 물을 조금 붓고 기다립니다. 그래요, 원두도 밥처럼 뜸들이는 시간이 필요..
만나서 반가웠고, 그동안 고마웠어 _ 관계의 정리 마흔 살의 수짱, 그럼 안녕얼마 전, 정말 오랜만에 나온 ‘수짱 시리즈’ 최신간 『나답게 살고 있습니다』를 읽다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장면 때문입니다. 잠깐 설명하자면, 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온 수짱과 친구의 대화입니다. 친구는 수짱이 부모님이 계신 고향에 다녀온 줄만 알아요."가족들은 모두 건강하셔?""응 덕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말하면, 친구는 위로를 해줄 것이고, 자신은 괜찮다고 말해야 하는데, 그 말이 아직 하기 싫어서, 가족의 안부를 묻는 친구에게 "응, 덕분에."라고 합니다. 덕분에라니, 덕분에라니. 마흔이 된 수짱이 ‘나답게 사는 방법’이 이런 것이라니 정말 싫었습니다.나중에 사실을 알게 되면 사와코 씨는 어떤 마음일까요. 수짱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줄도 모르고 수짱이 준 고향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