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살의 수짱, 그럼 안녕
얼마 전, 정말 오랜만에 나온 ‘수짱 시리즈’ 최신간 『나답게 살고 있습니다』를 읽다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장면 때문입니다.
잠깐 설명하자면, 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온 수짱과 친구의 대화입니다. 친구는 수짱이 부모님이 계신 고향에 다녀온 줄만 알아요.
"가족들은 모두 건강하셔?"
"응 덕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말하면, 친구는 위로를 해줄 것이고, 자신은 괜찮다고 말해야 하는데, 그 말이 아직 하기 싫어서, 가족의 안부를 묻는 친구에게 "응, 덕분에."라고 합니다. 덕분에라니, 덕분에라니.
마흔이 된 수짱이 ‘나답게 사는 방법’이 이런 것이라니 정말 싫었습니다.
나중에 사실을 알게 되면 사와코 씨는 어떤 마음일까요. 수짱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줄도 모르고 수짱이 준 고향특산품을 받으며 한가한 소리나 하고 있었다니, 도대체 나는 이 사람의 무엇이었을까. 친구이기나 했을까 그 참담한 마음을요.
수짱이 그녀를 지인,이라고 말했다면 전 이해했을 겁니다. 그런데 수짱이 벌써 이렇게나 오래 된 사이이네, 할 친구였어요, 사와코 씨는. 수짱 시리즈를 읽어 온 저도 익숙할만큼 사회에서 만나긴 했지만 많은 것들을 함께 해왔죠.
수짱은 왜 친구에게 꼭 괜찮다고 답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요. 수짱의 친구란 그런 것일까요.
2012년 겨울,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에서 수짱을 처음 만나, (나 혼자) 친구가 되었습니다. 『지금 이대로 괜찮은걸까』의 수짱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괜찮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아무래도 싫은 사람』의 수짱에게 나도 그런 사람이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수짱의 연애』에서 연애하는 수짱을 응원했지만, 모든 연애가 해피엔딩일 순 없다고 위로했습니다.
그리고 사이사이 수짱의 분신같은 사람들이 등장하는 마스다 미리의 작품들과도 친구가 되었죠.
그런데, 이제는 헤어질 때인가 봅니다. 마흔이 된 수짱에게 기대한 건 이런 건 아니었어요. 시간이 훌쩍 흐르는 동안 수짱은 나와는 잘 맞지 않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저는 수짱을 비롯한 마스다 미리의 책을 정리하기로 했습니다. 보통 책을 정리할 땐 주변 지인이나 친구들에게 읽을 것인지를 묻고 선물하곤 하는데, 이번 건은 좋은 이별이 아니어서, 굳이 따지자면 저의 절교선언 같은 것이어서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좀 더 공식적으로 당근마켓에 내놓는 걸 선택합니다. 수짱 시리즈는 금방 다른 사람에게 갔습니다. 아마 그곳에서 누군가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주겠죠.
저는 오랫동안 아꼈던 수짱과 절교했습니다. 만나서 정말 반가웠고, 친구로 있는 동안 고마웠다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다시는 만나지 말아요, 행운을 빌어요 라는 말도 함께 하고 싶네요.
묵힌다고 모든 술이 약주가 되지 않는 것처럼 사람 사이에도 유통기한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동안 들인 시간과 노력이 아까워서 과거의 추억으로 견뎌봐야 결국 바스러질 것을 알잖아요. 온전한 형태가 있을 때 점잖게 이별하는 것도 관계에 대한 예의일지도 모르겠네, 그런 생각이 드는 날입니다.
만나서 반가웠고, 그동안 고마웠어, 잘 지내고 다시는 보지 말자. 내 인생의 한 때 가장 멋졌던 친구야.
(그 친구와 절교한지도 벌써 10년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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