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든 방공호 하나는 갖고 있기를
별 이유 없이 나를 볶을 때가 있습니다. 내가 가진 것들이 비루하고 초라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일단 그쪽으로 스위치가 켜지면 마음은 아래로 아래로 굴러가고, 발은 자꾸만 빨려 들어갑니다. 이대로 조금만 더 가면 나의 불안이, 나의 불만이 나의 초라함이 나를 잡아먹고야 말 겁니다.
그럴 때 나의 방공호는 커피입니다. 얼른 안전문을 열고 피신합니다.
원두를 갑니다. 내 손을 써서 돌려야 합니다. 급하게 돌리면 원두가 밖으로 튀니까 조심조심 갈아야 합니다.
물을 끓입니다.
서버 위에 드리퍼를 얹고 뜨거운 물을 부어 서버와 드리퍼를 잠깐 데웁니다. 드리퍼에 여과지를 깔고 갈아놓은 원두를 조심스레 붓고 물을 조금 붓고 기다립니다. 그래요, 원두도 밥처럼 뜸들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원두가루가 조금씩 조금씩 부풀어올라 봉긋해집니다. 그걸 보고 있으면 쪼그라든 마음도 조금씩 부풀어오른달까, 발 아래 누가 작은 돌을 괴주는 느낌이랄까요. 균열없이 예쁘게 봉긋이 솟아오르면 내 미간도 조금은 펴집니다.
서버에 고인 물을 버리고 이제 본격적인 시작입니다.
세 번에 걸쳐 물을 부어 커피를 내립니다.
내려야 할 커피 양의 절반을 처음에 붓고, 남은 양의 삼분의 이를 다음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물이 다 빠지기 전에 물을 부어야 하니까 집중해야 합니다. 물길이 거칠수록 커피맛도 거칠어지니까 섬세하게.
커피를 다 내렸으면, 잔에 붓고 마시면 됩니다.
어, 그런데 잔에 물이 있네요. 맞아요. 서버를 데웠듯이 잔에도 미리 뜨거운 물을 부어 놓습니다.
이렇게 작은 것 하나가 커피 맛을 더 좋게 하거든요.
물을 끓이는 시간
원두를 가는 시간
차가운 서버와 드리퍼를 데우는 시간
원두가 뜸들기를 기다리는 시간
적당한 굵기의 물줄기로 커피를 내리는 시간
커피잔을 데우는 시간
동시에 진행되기도, 각자 진행되기도 하는 이 과정에 시간이 필요합니다. 전체 과정을 통틀어도 5~6분이면 되는 짧은 시간이지만, 하나라도 생략하면 아쉽습니다.
이렇게 커피를 내리다 보면 어느새 몸도 마음도 여기, 오늘, 땅을 밟고 서 있습니다. 나를 괴롭히는 못난 나에게 필요한 건 적당한 시간이었던 겁니다.
(내가) 되고 싶은 내가 (내가) 갖고 싶은 것을 갖는데도 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커피가 말해줍니다. 그 시간 속에는 반드시 내 손과 내 수고가 함께 해야 한다는 것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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